- 강원학
- 문화의 세기, 21세기의 지역문화
- 강원도 역사문화 전통의 현대적 의미
- 문화환경의 변화에 따른 지역정체성의 문제와 전망
- 江原學의 어제와 오늘
- 江原 考古學의 회고와 전망
- 江原 地方史 硏究의 現在와 課題
- 강원도 민속학의 발전과정과 전망
- 조선조 중기 강원지방의 유학(儒學· 性理學)
- 강원지역연구의 동향과 특징
- 강원문화연구의 과제와 전망
- 강원학 연구의 의의와 정립방향
- 지역학 연구와 원주학
- 제주학 연구의 성과와 과제
문화의 세기, 21세기의 지역문화 최 정 호(울산대학교 석좌교수)
김진선 지사님
황인정 원장님
최승익 사장님
세미나 참석자 여러분
새천년의 벽두에 이 아름다운 도시 춘천에서 새천년에 가장 어울리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마련하신 이니셔티브에 먼저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에서 얘기할 기회를 제게 주신 이 모임의 주최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세미나에 나와달라는 황인정원장의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서 기꺼이 수락을 했습니다. 황원장과 저와 한국미래학회를 인연으로 맺은 30년이 넘는 우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에 못지 않게 제가 이 세미나에 참석을 즉석에서 쾌락한 까닭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 사사롭기도 하고 동시에 공변된 것이기도 한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지금 밝아오는 "새천년" 이란 말이 우리에게 단순히 관념적인 수사가 아니라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한국에 있어서는 바로 "탈중심"의 지방화를 지향할 수 있는 새천년이란 의미에서 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생명의 복제조차 가능케 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도 우리들 인간은 시간적 존재로서 겸허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백년, 아니 십년의 미래도 예측하기가 어려운 우리들 인간이 하물며 천년의 미래를 운운한다는 것은 참으로 분수를 모르는 참월한 지적인 오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천년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난 천년에 있었던 역사의 큰 줄기를 잡아 보는 일이오 거기에서 앞으로 가야 할 역사의 바른 흐름을 짚어 보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한국사의 문맥에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 에 큰 이의는 없을 줄 믿습니다.
통일신라이후 한반도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일관하여 중앙집권주의, 수도중심주의, 중앙일극 (一極)주의의 천년역사를 이어왔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그러한 중앙집권주의를 더욱 심화, 악화시켜서 서울로의 인구집중과 물류집중, 행정집중과 문화집중을 가중화, 가속화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전국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집중하고, 다시 그 절반이 서울에 집중하여 사람도 자동차도 운신하기조차 힘들게 된 것이 세기말에 서울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전국의 모든 도시가 해바라기처럼 서울만 바라보고 스스로의 개성과 문화를 상실한 채 서울의 아류화되어 온 것이 지난 천년대 말의 한반도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중앙일극중심주의의 흐름, 수도권의 과비대화의 경향을 방치한 채 서울에서 교통문제, 주택문제, 청소년문제, 교육문제 따위를 해결한다는 것은 맹목이 아니라면 위선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점차 파국으로만 접근해 가는 이러한 흐름을 잡지 못한다면 비단 서울의 미래만이 아니라 한국의 미래가 어둡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확신에서 1997년 10월, 저는 제가 책임을 맡고 있는 한 위원회의 보고서 "문화 비젼 2000 -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 - "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습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중앙집권으로 일관한 한반도 천년의 구심적(求心的)인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탈중심, 탈중앙의 원심적(遠心的)인 새천년의 역사를 트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지방문화, 지역문화의 육성진흥은 그러한 분권화, 다극화의 필수적인 전제이다. 문화는 오직 다양성 속에서만 크게 꽃을 피울 수 있다. 저물어 가는 20세기는 문화적으로 서울이 곧 한국의 전부였다면, 앞으로 올 21세기는 한국의 전 지역이 문화적으로 서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이 "새천년과 강원학" 세미나는 바로 그 같은 탈 중심 다극화의 21세기 벽두에 한국 및 한국문화의 지역화, 지방화를 위한 새로운 대장정에 출발의 횃불을 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발의를 하신 강원개발연구원과 강원일보사에 새삼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 다음 제가 이 세미나의 초청을 쾌락한 두 번째 이유는 얼마쯤은 사사로운 동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원도에 오래전부터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해방을 맞으면서 구두선처럼 되뇌이던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금수강산이란 말이 한낱 공허한 관용구가 아니라 실체있는 수식어란 것을 실감한 것은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뒤, 1970년대 초에 춘천, 강릉, 속초 등 강원도 땅을 밟아 보면서부터 입니다. 강원도 여행은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나라요, 금수강산이라는 것을 저에게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로부터 저는 몇년동안을 해마다 여름이면 강원도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철을 지내곤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말을 빌려서 다소 현학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강원도 땅에서 저는 사물의 "이데아"(본질)를 "테오리"(관조-사색)하는 고귀한 "스콜레"(여가)를 누렸던 셈입니다. 과연 이 고장에서 누린 거듭된 여름 휴가의 고귀한 "스콜레"는 저에게 우리들의 조국인 한반도의 본질을 관조하는데 매우 귀중한 체험의 바탕이 되어 주었습니다.
강원도는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가장 산이 많은 곳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달리는 열차의 창 밖을 내다보 면서, 그리고 속초와 서울을 나르는 비행기의 창밑을 내려다보면서 한국은 바로 "산악국가"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근년에는 자동 차로 협곡을 누비며 태백시를 방문하면서 도중 풍경을 보고 이태리의 밀라노에서 프랑스의 샤모니로 가는 몬테 비앙코 (몽블랑)의 알프스 계곡과 너무나도 흡사한 아름다움에 탄복한 일도 있습니다. 저는 강원도에서 한국이 "알프스 국가"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강원도는 원덕, 삼척에서 출발하여 강릉, 속초를 거쳐 북한의 통천, 원산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가장 넓은 바다를 안고 있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설악산, 금강산만이 강원도의 권속이 아니라 원산, 강릉의 해수욕장, 삼척, 동해의 항구도 강원도의 권속 인 것입니다. 한국은 비단 산악국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해안국가라는 우리 국토의 본질을 저는 강원도에서 여러 차례 가진 "스콜레"에 서 배운 것입니다. 사람의 배움터라는 "학교"의 서양말인 영어의 school이나 독일어의 Schule란 말은 모두 다 고대 그리스어의 "스콜레" (schole)에서 나온 말입니다. 강원도는 저에게 한국의 본질을 가르쳐 준 학교였던 셈입니다.
산악국가 한국,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가 어느 시대에 살든, 어느 고장에 살든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는 어디를 가 보아도 산이 없는 풍경이란 없습니다. 아침해는 동산에서 뜨고 저녁해는 서산으로 지는 것이 한국입니다. 산이 없는 풍경이란 한국의 현실세계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심상세계에도 없습니다. 서양말의 풍경(Landscape, Landschaft)은 토지나 경지와 같은 평면적인 땅(Land)에서 나왔고 그러한 땅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풍경화라고 합니다만 한국의 풍경은 평면적인 땅이 아니라 입체적인 "강산(江山)", 또는 "산천(山川)"이요, 그것을 그린 그림도 산수화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산(山)"이란 말이 거기엔 빠지지 않고 반드시 들어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산은 한국적인 자연의 얼굴만이 아니라 그 문화의 얼굴조차 결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에 있어서는 "나 있음"과 "산 있음"이 하나요, "산 경험"과 "삶 경험"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리 만큼 산은 한국인의 삶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해양국가 한국, 그렇습니다. 한국은 국토의 2/3가 산으로 덮인 산악국가이자 국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가입니다. 한반도는 그를 뭍에서 본다면, 육지에서 본다면 작은 나라입니다. 지난 날 대륙의 중원만을 바라보던 조선왕조시대에는 한반도는 틀림없이 작은 나라였습니다. 한반도는 그러나 그를 물에서 바라본다면, 바다에서 바라본다면 이미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현대의 한국이 산업화 과정 속에서 바다로 진출하면서 원양어업, 해운업 등은 이미 세계 10위권 안에 들고 있으며 조선업은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대국 을 제치며 당당히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해양대국이 되고 있습니다.
땅덩어리로 보면 한반도가 작은 나라인 것처럼 유럽도 작은 대륙입니다. 지구 위의 가장 작은 대륙입니다. 유럽은 유라시아대륙의 반도모 양으로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뛰어난 의미에서 해양적 대륙" (le continent maritime par excellenc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해양이 유럽을, 유럽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la mer a fait sortir l'Europe de l'Europe)라고 스위스의 역사학자 레놀드 (Gonzague de Reynold)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럽이 바다를 향해 유럽을 떠나는 이른바 "대 항해의 시대"를 열면서 유럽은 세계를 지배하는 대 유럽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에 자리잡은 한국도 뛰어난 의미에서 해양국가입니다. 이 해양이 한국을 한국으로부터 떠나기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바다를 등지고 육지 안에 움츠리고 있을 때 한국은 틀림없는 약소국이었으나 한국인이 바다를 향해 한국을 떠날 때 한국인은 위대한 한국인이 되고는 했습니다. 일찍이 장보고가 그랬고 이 충무공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를 향해 시장을 개척하고 공사를 수주해 온 오늘의 한국인이 그러한 것처럼, 국토공간으로서의 산과 바다는 역사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우리민족의 생존공간이오. 그 점에서 그것은 관성, 보수성, 영속성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별로 변화하지 않는 국토 공간의 보수적 영속적인 타성은 과거지향적이자 동시에 미래지향적인 양면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토공간은 우리들의 선대가 우리에게 넘겨준 틀림없는 "과거의 유산 "이자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후손에게 물려줄 틀림없는 "미래에의 유산"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토공간은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미래를 안고 있는 현실" 이라고 해서 좋을 줄 압니다.
산업화 이후 이른바 "환경의 세기"라 일컫고 있는 새로운 21세기에서 갈수록 소리 높이 논의되고 있는 "삶의 질"이란 무엇입니까?
앞으로 우리들의 삶의 질은 다른 무엇보다도 맑은 햇빛,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깨끗한 흙에서 살 수 있는 생태학적 환경의 질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의 질을 결정하는 원소들을 공급해 주는 보고가 바로 산림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한국인의 삶은 국토의 생태학적 환경의 질에 의해서 결정되고 국토환경의 질은 다시 그 2/3를 차지하는 산을 우리들이 오늘 어떻게 가꾸느냐 하는 노력 여하에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산은 그러나 "보존"하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국토면적의 2/3가 산이라 함은 산지를 빼놓고 이용할 수 있는 평지 면적이 국토의 1/3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산은 우리들의 삶의 질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을 공급해 주는 원천으로써 그 생태학적 환경이 보존되 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좁은 국토에 세계 3위의 고 밀도 인구를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보금자리, 삶의 터전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여백으로서 산은 국민생활의 이용 후생을 위하여 "개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산은 21세기의 풍요로운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토지수요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론티어가 될 수밖에 없고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산지의 개발이나 이용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개발하고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각형의 어느 2변의 화(和)도 다른 1변보다 크다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산이 많은 한국의 국토면적은 그 산을 효율적으로 이용만 한다면 산이 없는 평지만으로 된 국토보다 그 면적이 훨씬 넓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산이 많기 때문에 한국은 평지만으로 된 국토보다 조림면적이 크고 환경자원, 관광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국토면적이 이미 넓게 확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산록에서 산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서 연중 실내온도의 변화가 없는 보관창고를 짓고 산 굴속에 외부의 소음이 없는 콘서트홀을 지음으로써 지중 도시의 건설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유명한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의 축제극장은 바위산을 뚫고 지은 건물입니다.
이처럼 산 속으로 굴을 파서 보관창고를 짓고 음악당, 극장, 미술관을 짓는다면 산이 많은 우리나라 국토는 삼각형의 이변만이 아니라 3변을 다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절양장이 물도곤 어여웨라"고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 "저 바다가 육지라면..."하고 물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바다는 사람의 내왕을 가로막는 "절해"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길이기도 합니다.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바다는 육로보다 편하고 가까운 "물길"을 열어 줬습니다.
유럽을 유럽으로부터 떠나게 한 유럽문명은 지중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중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지중의 바다, 육지에 둘러싸인 바다라는 뜻입니다. 바다가 사람의 내왕을 가로막는 "절해"가 되지 않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육로보다 편한 통로가 될 때 그 바다 는 지중의 바다, 땅속의 연못과 같은 지중해가 되는 것입니다.
강원도는 그러한 바다를 가장 넓게 가지고 있는 고장입니다. 장강이 쏟아내는 토사와 폐기물로 죽어 가는 황해와는 달리 수심이 깊은 동해안에는 어디서나 대형항구와 대형 조선소가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중국은 부러워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동해는 한, 중, 일, 러 네 나라가 만나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바다는 서로 그를 차지하려고 그 이름부터 "동해"다, "일본해"다 하고 다투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싸움을 지양하고 이 바다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교류와 번영을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다고 저는 혼자서 오래 전부터 생각 해 왔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와 소아시아가 만나는 바다를 서양인이 지중해라 일컬은 것처럼 한국, 중국, 일본이 만나는 바다를 "동 지중해"(the oriental mediterranean)이라고 부르자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강원도는 동아시아 지중해의 "리비에라"요, 극동의 황금해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강원도는 프랑스의 리비에라보다 더 아름다운 해안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강산, 설악산 등 더욱 수려한 관광자원도 안고 있습니다. 강원도는 우리나라의 풍요로운 "멋"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 모임에 초대받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제, 오늘 갑자기 생각해 낸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90년대에 한국미래 학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오랜 숙원사업을 세 가지 성취했습니다. "산과 한국인의 삶", "물과 한국인의 삶", "멋과 한국인의 삶" 이라는 세 가지 연구프로젝트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주제마다 한국미래학회에서는 각각 1년씩 월례회를 거듭해서 그 다음해엔 육백 페이지 안팎의 두툼한 책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산과 더불어 살고 바다에 둘러 싸여 살면서 그 속에서 멋을 찾고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산이 많은 곳이 강원도요, 그러한 바다와 가장 넓게 만나는 곳이 강원도요, 그러한 국토와 국토의 멋을 꽃피워 온 곳이 강원도입니다.
강원도는 가장 한국적인 국토와 가장 한국적인 멋을 지닌 고장입니다. 강원도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한국을 연구한다는 것에 통합니다. 강원학은 곧, 한국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강원학을 새 천년의 벽두에 발의(發議)한 오늘 이 세미나의 주최측과 여기에 참여하신 이 자리의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강원도의 미래가 한국의 미래라는 확신이 거기에는 깃들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인정 원장님
최승익 사장님
세미나 참석자 여러분
새천년의 벽두에 이 아름다운 도시 춘천에서 새천년에 가장 어울리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마련하신 이니셔티브에 먼저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에서 얘기할 기회를 제게 주신 이 모임의 주최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세미나에 나와달라는 황인정원장의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서 기꺼이 수락을 했습니다. 황원장과 저와 한국미래학회를 인연으로 맺은 30년이 넘는 우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에 못지 않게 제가 이 세미나에 참석을 즉석에서 쾌락한 까닭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 사사롭기도 하고 동시에 공변된 것이기도 한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지금 밝아오는 "새천년" 이란 말이 우리에게 단순히 관념적인 수사가 아니라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한국에 있어서는 바로 "탈중심"의 지방화를 지향할 수 있는 새천년이란 의미에서 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생명의 복제조차 가능케 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도 우리들 인간은 시간적 존재로서 겸허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백년, 아니 십년의 미래도 예측하기가 어려운 우리들 인간이 하물며 천년의 미래를 운운한다는 것은 참으로 분수를 모르는 참월한 지적인 오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천년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난 천년에 있었던 역사의 큰 줄기를 잡아 보는 일이오 거기에서 앞으로 가야 할 역사의 바른 흐름을 짚어 보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한국사의 문맥에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 에 큰 이의는 없을 줄 믿습니다.
통일신라이후 한반도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일관하여 중앙집권주의, 수도중심주의, 중앙일극 (一極)주의의 천년역사를 이어왔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그러한 중앙집권주의를 더욱 심화, 악화시켜서 서울로의 인구집중과 물류집중, 행정집중과 문화집중을 가중화, 가속화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전국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집중하고, 다시 그 절반이 서울에 집중하여 사람도 자동차도 운신하기조차 힘들게 된 것이 세기말에 서울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전국의 모든 도시가 해바라기처럼 서울만 바라보고 스스로의 개성과 문화를 상실한 채 서울의 아류화되어 온 것이 지난 천년대 말의 한반도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중앙일극중심주의의 흐름, 수도권의 과비대화의 경향을 방치한 채 서울에서 교통문제, 주택문제, 청소년문제, 교육문제 따위를 해결한다는 것은 맹목이 아니라면 위선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점차 파국으로만 접근해 가는 이러한 흐름을 잡지 못한다면 비단 서울의 미래만이 아니라 한국의 미래가 어둡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확신에서 1997년 10월, 저는 제가 책임을 맡고 있는 한 위원회의 보고서 "문화 비젼 2000 -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 - "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습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중앙집권으로 일관한 한반도 천년의 구심적(求心的)인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탈중심, 탈중앙의 원심적(遠心的)인 새천년의 역사를 트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지방문화, 지역문화의 육성진흥은 그러한 분권화, 다극화의 필수적인 전제이다. 문화는 오직 다양성 속에서만 크게 꽃을 피울 수 있다. 저물어 가는 20세기는 문화적으로 서울이 곧 한국의 전부였다면, 앞으로 올 21세기는 한국의 전 지역이 문화적으로 서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이 "새천년과 강원학" 세미나는 바로 그 같은 탈 중심 다극화의 21세기 벽두에 한국 및 한국문화의 지역화, 지방화를 위한 새로운 대장정에 출발의 횃불을 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발의를 하신 강원개발연구원과 강원일보사에 새삼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 다음 제가 이 세미나의 초청을 쾌락한 두 번째 이유는 얼마쯤은 사사로운 동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원도에 오래전부터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해방을 맞으면서 구두선처럼 되뇌이던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금수강산이란 말이 한낱 공허한 관용구가 아니라 실체있는 수식어란 것을 실감한 것은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뒤, 1970년대 초에 춘천, 강릉, 속초 등 강원도 땅을 밟아 보면서부터 입니다. 강원도 여행은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나라요, 금수강산이라는 것을 저에게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로부터 저는 몇년동안을 해마다 여름이면 강원도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철을 지내곤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말을 빌려서 다소 현학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강원도 땅에서 저는 사물의 "이데아"(본질)를 "테오리"(관조-사색)하는 고귀한 "스콜레"(여가)를 누렸던 셈입니다. 과연 이 고장에서 누린 거듭된 여름 휴가의 고귀한 "스콜레"는 저에게 우리들의 조국인 한반도의 본질을 관조하는데 매우 귀중한 체험의 바탕이 되어 주었습니다.
강원도는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가장 산이 많은 곳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달리는 열차의 창 밖을 내다보 면서, 그리고 속초와 서울을 나르는 비행기의 창밑을 내려다보면서 한국은 바로 "산악국가"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근년에는 자동 차로 협곡을 누비며 태백시를 방문하면서 도중 풍경을 보고 이태리의 밀라노에서 프랑스의 샤모니로 가는 몬테 비앙코 (몽블랑)의 알프스 계곡과 너무나도 흡사한 아름다움에 탄복한 일도 있습니다. 저는 강원도에서 한국이 "알프스 국가"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강원도는 원덕, 삼척에서 출발하여 강릉, 속초를 거쳐 북한의 통천, 원산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가장 넓은 바다를 안고 있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설악산, 금강산만이 강원도의 권속이 아니라 원산, 강릉의 해수욕장, 삼척, 동해의 항구도 강원도의 권속 인 것입니다. 한국은 비단 산악국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해안국가라는 우리 국토의 본질을 저는 강원도에서 여러 차례 가진 "스콜레"에 서 배운 것입니다. 사람의 배움터라는 "학교"의 서양말인 영어의 school이나 독일어의 Schule란 말은 모두 다 고대 그리스어의 "스콜레" (schole)에서 나온 말입니다. 강원도는 저에게 한국의 본질을 가르쳐 준 학교였던 셈입니다.
산악국가 한국,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가 어느 시대에 살든, 어느 고장에 살든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는 어디를 가 보아도 산이 없는 풍경이란 없습니다. 아침해는 동산에서 뜨고 저녁해는 서산으로 지는 것이 한국입니다. 산이 없는 풍경이란 한국의 현실세계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심상세계에도 없습니다. 서양말의 풍경(Landscape, Landschaft)은 토지나 경지와 같은 평면적인 땅(Land)에서 나왔고 그러한 땅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풍경화라고 합니다만 한국의 풍경은 평면적인 땅이 아니라 입체적인 "강산(江山)", 또는 "산천(山川)"이요, 그것을 그린 그림도 산수화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산(山)"이란 말이 거기엔 빠지지 않고 반드시 들어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산은 한국적인 자연의 얼굴만이 아니라 그 문화의 얼굴조차 결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에 있어서는 "나 있음"과 "산 있음"이 하나요, "산 경험"과 "삶 경험"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리 만큼 산은 한국인의 삶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해양국가 한국, 그렇습니다. 한국은 국토의 2/3가 산으로 덮인 산악국가이자 국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가입니다. 한반도는 그를 뭍에서 본다면, 육지에서 본다면 작은 나라입니다. 지난 날 대륙의 중원만을 바라보던 조선왕조시대에는 한반도는 틀림없이 작은 나라였습니다. 한반도는 그러나 그를 물에서 바라본다면, 바다에서 바라본다면 이미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현대의 한국이 산업화 과정 속에서 바다로 진출하면서 원양어업, 해운업 등은 이미 세계 10위권 안에 들고 있으며 조선업은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대국 을 제치며 당당히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해양대국이 되고 있습니다.
땅덩어리로 보면 한반도가 작은 나라인 것처럼 유럽도 작은 대륙입니다. 지구 위의 가장 작은 대륙입니다. 유럽은 유라시아대륙의 반도모 양으로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뛰어난 의미에서 해양적 대륙" (le continent maritime par excellenc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해양이 유럽을, 유럽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la mer a fait sortir l'Europe de l'Europe)라고 스위스의 역사학자 레놀드 (Gonzague de Reynold)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럽이 바다를 향해 유럽을 떠나는 이른바 "대 항해의 시대"를 열면서 유럽은 세계를 지배하는 대 유럽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에 자리잡은 한국도 뛰어난 의미에서 해양국가입니다. 이 해양이 한국을 한국으로부터 떠나기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바다를 등지고 육지 안에 움츠리고 있을 때 한국은 틀림없는 약소국이었으나 한국인이 바다를 향해 한국을 떠날 때 한국인은 위대한 한국인이 되고는 했습니다. 일찍이 장보고가 그랬고 이 충무공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를 향해 시장을 개척하고 공사를 수주해 온 오늘의 한국인이 그러한 것처럼, 국토공간으로서의 산과 바다는 역사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우리민족의 생존공간이오. 그 점에서 그것은 관성, 보수성, 영속성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별로 변화하지 않는 국토 공간의 보수적 영속적인 타성은 과거지향적이자 동시에 미래지향적인 양면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토공간은 우리들의 선대가 우리에게 넘겨준 틀림없는 "과거의 유산 "이자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후손에게 물려줄 틀림없는 "미래에의 유산"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토공간은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미래를 안고 있는 현실" 이라고 해서 좋을 줄 압니다.
산업화 이후 이른바 "환경의 세기"라 일컫고 있는 새로운 21세기에서 갈수록 소리 높이 논의되고 있는 "삶의 질"이란 무엇입니까?
앞으로 우리들의 삶의 질은 다른 무엇보다도 맑은 햇빛,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깨끗한 흙에서 살 수 있는 생태학적 환경의 질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의 질을 결정하는 원소들을 공급해 주는 보고가 바로 산림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한국인의 삶은 국토의 생태학적 환경의 질에 의해서 결정되고 국토환경의 질은 다시 그 2/3를 차지하는 산을 우리들이 오늘 어떻게 가꾸느냐 하는 노력 여하에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산은 그러나 "보존"하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국토면적의 2/3가 산이라 함은 산지를 빼놓고 이용할 수 있는 평지 면적이 국토의 1/3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산은 우리들의 삶의 질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을 공급해 주는 원천으로써 그 생태학적 환경이 보존되 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좁은 국토에 세계 3위의 고 밀도 인구를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보금자리, 삶의 터전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여백으로서 산은 국민생활의 이용 후생을 위하여 "개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산은 21세기의 풍요로운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토지수요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론티어가 될 수밖에 없고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산지의 개발이나 이용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개발하고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각형의 어느 2변의 화(和)도 다른 1변보다 크다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산이 많은 한국의 국토면적은 그 산을 효율적으로 이용만 한다면 산이 없는 평지만으로 된 국토보다 그 면적이 훨씬 넓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산이 많기 때문에 한국은 평지만으로 된 국토보다 조림면적이 크고 환경자원, 관광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국토면적이 이미 넓게 확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산록에서 산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서 연중 실내온도의 변화가 없는 보관창고를 짓고 산 굴속에 외부의 소음이 없는 콘서트홀을 지음으로써 지중 도시의 건설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유명한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의 축제극장은 바위산을 뚫고 지은 건물입니다.
이처럼 산 속으로 굴을 파서 보관창고를 짓고 음악당, 극장, 미술관을 짓는다면 산이 많은 우리나라 국토는 삼각형의 이변만이 아니라 3변을 다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절양장이 물도곤 어여웨라"고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 "저 바다가 육지라면..."하고 물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바다는 사람의 내왕을 가로막는 "절해"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길이기도 합니다.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바다는 육로보다 편하고 가까운 "물길"을 열어 줬습니다.
유럽을 유럽으로부터 떠나게 한 유럽문명은 지중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중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지중의 바다, 육지에 둘러싸인 바다라는 뜻입니다. 바다가 사람의 내왕을 가로막는 "절해"가 되지 않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육로보다 편한 통로가 될 때 그 바다 는 지중의 바다, 땅속의 연못과 같은 지중해가 되는 것입니다.
강원도는 그러한 바다를 가장 넓게 가지고 있는 고장입니다. 장강이 쏟아내는 토사와 폐기물로 죽어 가는 황해와는 달리 수심이 깊은 동해안에는 어디서나 대형항구와 대형 조선소가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중국은 부러워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동해는 한, 중, 일, 러 네 나라가 만나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바다는 서로 그를 차지하려고 그 이름부터 "동해"다, "일본해"다 하고 다투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싸움을 지양하고 이 바다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교류와 번영을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다고 저는 혼자서 오래 전부터 생각 해 왔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와 소아시아가 만나는 바다를 서양인이 지중해라 일컬은 것처럼 한국, 중국, 일본이 만나는 바다를 "동 지중해"(the oriental mediterranean)이라고 부르자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강원도는 동아시아 지중해의 "리비에라"요, 극동의 황금해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강원도는 프랑스의 리비에라보다 더 아름다운 해안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강산, 설악산 등 더욱 수려한 관광자원도 안고 있습니다. 강원도는 우리나라의 풍요로운 "멋"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 모임에 초대받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제, 오늘 갑자기 생각해 낸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90년대에 한국미래 학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오랜 숙원사업을 세 가지 성취했습니다. "산과 한국인의 삶", "물과 한국인의 삶", "멋과 한국인의 삶" 이라는 세 가지 연구프로젝트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주제마다 한국미래학회에서는 각각 1년씩 월례회를 거듭해서 그 다음해엔 육백 페이지 안팎의 두툼한 책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산과 더불어 살고 바다에 둘러 싸여 살면서 그 속에서 멋을 찾고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산이 많은 곳이 강원도요, 그러한 바다와 가장 넓게 만나는 곳이 강원도요, 그러한 국토와 국토의 멋을 꽃피워 온 곳이 강원도입니다.
강원도는 가장 한국적인 국토와 가장 한국적인 멋을 지닌 고장입니다. 강원도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한국을 연구한다는 것에 통합니다. 강원학은 곧, 한국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강원학을 새 천년의 벽두에 발의(發議)한 오늘 이 세미나의 주최측과 여기에 참여하신 이 자리의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강원도의 미래가 한국의 미래라는 확신이 거기에는 깃들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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