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原學의 어제와 오늘 崔 承 洵(율곡학회 이사장)

1. 鄕土學의 意義
近年 特定地域에 관한 硏究가 活發하게 開展되어 硏究의 主題를 特定地域名이나 鄕土라는 말로 冠形하고 있는 現象이 많음을 發見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 날의 우리의 歷史나 關心事가 中央에 集中되어 있어 地方史나 地方文化는 거의 疎外되어 오다가 近年에 와서 地域中心의 歷史나 文化가 世人의 關心事가 되어 이 方面의 硏究가 學界에 浮上하게 됨에 따라 鄕土學이나 地域文化學이 學界의 큰 脈의 하나로 登場하게 된데 緣由했다 할 것이다.

지난날의 우리 歷史나 文化는 中央集中의 歷史요 文化였다. 이것은 中央集權體制의 歷代 王朝의 政治體制가 地方分權的 政治나 文化의 育成은 고사하고 容納조차 拒否했던 狀況에서 地域單位의 文化創造나 硏究에 關心을 둘 수 없었다는 것은 그때의 형편으로 보면 오히려 順理였다고 할 것이다. 開化期 以後에는 異民族 箝制의 痛史時代로 民族史 조차 抹殺되던 處地였기에 地域文化를 論謂할 계제가 되지 못 하였고 光復後 最近까지는 日帝로 해서 層折이 생긴 우리 민족의 역사나 문화에 關心을 傾注하느라 鄕土學은 學問의 分野에서 注目이나 關心의 對象이 될 수 없었다.

이러던 것이 歷史硏究의 傾向이 一般史 중심에서 分類史 쪽으로 旣成文化 보다는 새로운 殘存文化의 硏究에 關心이 가게되고 이러한 傾向 의 推移는 마침내 향토학의 활발한 進展을 가져오게 되었고 오늘 우리가 論하는 江原學도 바로 이러한 趨勢에서 胎動하였다 할 것이다.

鄕土學의 當爲性은 한 마디로 말하면 歷史意識의 確立과 現實認識의 確定을 통한 未來의 指標設定에 있다 할 것이다. 역사나 문화는 그것이 어떠한 樣態의 것이든 連繫性이 있게 마련이다. 江原學도 江原道에 있었던 지난 날의 일들을 알자는데 이 학문의 宗旨가 있는 것이 아니고, 未來의 江原道 建設에 그 目標가 있다 할 것이다. 이러자면 강원도의 각 方面에 대한 理解가 要求되고 江原學은 이 요구를 充足시키려는 根源的 方途로 그 對象은 어느 特定部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강원도를 바탕으로 한 自然, 人文, 社會의 모든 分野가 網羅되어진다.

江原學이 未來指向的 性格의 학문이라 했을때 未來의 指標設定 自體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더욱이 여기에는 道民意識의 肯定的 轉換이 要求되는 결코 容易한 일이 아닌 作業이 뒤따라야 하지마는 不可能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成功한 例로 日本의 明治維新을 생각할 수 있다. 吉田松陰이라는 先覺者 한사람이 松下村塾이라는 書堂에서 不過 수십명의 사람을 길러냈던 것이 日本이 近代化하는데 성공하여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던 것이니, 足히 詳考해 볼 價値가 있다 할 것이다. 역사는 史實의 充實한 記錄에 그 意義의 全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는 귀감성이 있기에 지난날 강원도에서 있었던 일을 體系的으로 살핀다는 것은 부질없이 지난날을 回想하자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강원도를 만들어 보려는 創造的 歷史意志의 發顯이라 할 것이다. 지나온 뿌리를 살피지 않은 民族이나 集團은 歷史속 에 던져진 집단으로 退 하게 마련이고 創造의 意志가 있는 集團의 역사는 繁榮하게 마련이다. 오늘 여러 市道에서 그 나름의 鄕土學에 關心을 가지고 推進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命題 때문이며 江原學도 이런 점에서 例外는 아니다.
2. 江原鄕土學의 자취
江原學의 對象으로는 크게 둘로 集約하여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文書나 기타 다른 方法으로 具象化된 대상을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口碑나 具象化 되어있지 않은 殘存文化遺産을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형편상 採集의 過程을 거쳐야 할 잔존문화유산은 論外로 하고 우선 文書를 중심으로 한 江原學의 資料에 局限하여 論及하기로 한다.

史記나 遺事, 高麗史나 朝鮮王朝實錄과 같은 典籍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여기서 論及할 것은 없으나 다만 實錄의 경우는 數年前 江原道史 編纂作業의 一環으로 實錄에 登載된 江原道 關係 條項들을 뽑아 '江原道史料集'으로 發刊하였지마는 이것은 年代別로 되어있고 事件이나 內容別로 되어있지 아니하여 活用에 어려움이 있어 再作業이 要求된다.

江原學의 重要資料의 하나로 생각되는 것에 輿地誌가 있고 이것은 鄕土學 硏究에는 없어서는 안될 史料들이다. 우리나라에 本格的인 地誌가 發刊된 것은 15世紀 年間이다.(新撰八道地理志 1432年, 世宗實錄地理志 1454年, 東國輿地勝覽 1481) 15世紀 이후 中央政府의 命에 의하여 舊韓國末期까지 여러번 地誌가 편찬되었고, 이 地誌들의 原本은 奎章閣에 所藏되어 있어 所重한 史料 구실을 하고 있고, 道內의 大學이나 硏究機關에 그 複寫本이 所藏되어 있는 곳이 있다. 이들 地誌들은 鄕土學 硏究의 基本 典籍들이므로 앞으로 江原學 硏究의 公式的 機構가 생기면 一次的으로 이들 史料의 蒐集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日帝時代에 편찬된 地誌로는 몇개의 郡에서(例 1933년 增修臨瀛誌) 漢文本으로 편찬한 것과 日本人들이 편찬한 것이 있는데, 日本人에 의하여 만들어진 代表的인 것이 1913年에 春川憲兵隊本部編纂으로 되어 있는 452쪽의 『江原道狀況梗槪』이다. 이 時代는 日帝强占 初期로 憲兵政治를 하던 時代였으므로 如何한 種類의 책이던 韓國人에 의한 出版은 許可되지 않았던 탓으로 이 時期로 보아서는 唯一한 資料集이나, 道內에는 寫本 몇 권이 있을 뿐 一般에게 活用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밖에 朝鮮總督府에서 全國을 대상으로 편찬한 地誌나 文化關係 典籍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어느 한 地域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日帝때에 편찬된 江原道地誌로는 1940年에 만든 漢文本 『江原道誌』가 있어 道史가 아닌 道誌로서는 오늘까지도 자주 引用되는 江原學 硏究의 重要한 資料集이나 지금은 어쩌다 道內의 古家에서 散見될 뿐 接하기 어려운 典籍으로 이것은 그 資料性으로 보아 速한 時日內에 譯刊하여야 할 것이다. 光復後 江原道 鄕土學 關係作業의 큰 業績의 하나는 江原日報社에서 현재로 20卷까지 發刊한 『江原文化叢書』 이다. 지금은 執筆할 人的資源이 많지마는 1960年代 末에는 硏究人員도 充分하지 못한 狀況에서 新聞에 連載하여 道民들에게 이 方面의 意識을 깨치게 하였고, 그 連載가 短時日에 끝난 것이 아니고 20권의 叢書를 刊行했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內容도 江原道의 歷史 山河 詩文 民俗 口碑 人物 邑面 抗日史 等 각 分野에 걸쳐있어 江原學의 基盤을 연 셈이다.

光復後의 鄕土學分野에서 이루어진 業績 가운데 하나는 各 市郡마다 빠짐없이 發刊한 市郡誌와 그 市郡의 『○○의 歷史와 文化遺蹟』 이라는 책자의 發刊이다. 그런데 이들 책 가운데는 그 方面의 專門家들이 執筆하지 않고 간혹 旣 간행된 他郡의 것을 一部 옮겨 놓은 것이 있거나 地誌나 地域史의 性格을 理解하지 못한채 쓴 글이 있어 問題로 提起될 素地가 있는 것도 간혹 있다.

近年 道內 大學에 鄕土學硏究機關이 생겨 이 方面의 硏究나 調査活動도 活潑하여 江原大學校 부설 江原文化硏究所에서는 每年 1卷씩의 硏究誌를 發刊하여 1999年에 18輯을 내고 있는 것이 그 하나의 例이고, 이밖에 道內 여러 大學에서 이런 類의 刊行物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江原學의 앞날을 위하여는 鼓舞的이기는 하나 內容의 重複을 想定할 수 있어 이것도 그 解決의 기미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江原道內에는 公機關에 附設되어 있는 江原學 硏究機關 말고도 獨立된 鄕土文化硏究機關이 있고 이러한 기관들 가운데는 硏究誌의 發刊을 비롯한 硏究活動을 하지 못하고 있는 私設機關도 있지마는 法人體로 많은 業績을 내놓고 있는 '社團法人 江原鄕土文化硏究會'와 같은 硏究機關은 創設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硏究人員 構成으로 보나 硏究業績으로 보나 鄕土文化硏究에 寄與한 바 크고 江原鄕土學 관계 資料도 가장 많이 所藏하고 있어 앞으로의 江原學硏究에 期待가 큰 硏究機關의 하나이다.
3. 江原學과 資料
江原學은 歷史에 대한 意識과 現實認識에 따라 그 方向이 결정될 수도 있으나 江原學에서 가장 基本이 되는 것은 史料나 資料이다. 앞서 江原學硏究에서 가장 重要한 資料의 하나로 道誌, 道史와 各 市郡誌라는 말을 했거니와 넓은 意味에서의 江原學硏究資料는 江原道와 關係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資料가 될 수 있다. 그것은 江原學이 어느 特定部門의 學問이 아니고 江原道에 關係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該當이 되기 때문이다. 無形의 것으로는 口碑, 民譚에서 시작하여 高度의 學術書와 人物에 이르기까지 該當되지 않는 것이 없어 그 資料도 文書 典籍을 비롯하여 民具에 이르기까지 다 包括이 되어져 江原道民의 手澤 머문 것이나 情緖나 思想이 깃들어 있는 것은 다 資料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便宜上 文書나 典籍類에 限하여 言及을 하기로 한다.

數年前에 江原道 文化財課에서 江原道內의 古典籍을 調査한 바 있고 또 大學附設硏究所에서도 조사한 바 있으나 이것은 經費 時間 調査員의 事情 등으로 文字 그대로 望梅止渴의 調査여서 아직도 發掘해야 할 資料는 많고 이것이 발굴이 되어야 文書나 典籍을 通한 硏究가 可能할 것이다. 이 古文書나 典籍은 世居한 古家中에서도 文翰家에 있게 마련이며, 船橋莊과 守孤堂 등의 所藏品은 그 家門에서 이미 目錄을 作成한 바 있으나 이 外에도 아직 古文書의 大部分과 簡札 등은 調査가 되어있지 않고 있고, 이러한 狀況은 道內의 모든 文翰家가 비슷한 형편이다. 이것은 그 消失이 時間의 經過에 比例하므로 江原學 硏究의 機構가 創設되는 대로 速한 時日內에 調査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調査와 함께 江原道와 關係되는 사람의 著書나 江原道가 글의 背景 또는 主題나 素材로 되어있는 典籍에 대한 調査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栗谷集, 梅月堂集, 耘谷 元天錫詩史와 같이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진 것 外에도 漁村의 漁村集, 安 橋의 삽교집, 船橋莊의 主人이었던 鏡農의 鏡農集을 비롯하여 아직도 道內에는 調査되어져야 할 文典이 많이 남아 있으니 이에 대한 速한 조사도 이루어져야 한다.

江原道의 人物로 길이 推仰되는 毅菴의 경우도 그 墓域을 淨化하고 있으나 그의 思想의 淵源인 毅菴集에 관하여는 數年前에 道內의 뜻있는 敎授들에 의하여 그의 著書中의 一部인 『宇宙問答』이 譯刊된 것이 고작이고 오히려 中國 黑龍江省의 中國朝鮮族古籍整理 委員會에서 『柳麟錫全集』 일부가 우리 말로 譯刊되고 있으니 오늘의 우리의 處地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4. 結 語
江原學은 지난날의 江原道의 文化遺産만을 考究하는 것을 目的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마지막 指標는 江原道의 未來에 두어야 한다. 歷史意識이 缺如된 狀況에서 正統性이나 올바른 現實認識이 생길 수 없는 것을 보면 江原學은 單純히 지난 날의 우리 先祖들의 文化意識에 젖어 보려는 것이 아니고 來日의 躍動하는 江原을 만들어 보려는 基礎作業이라 할 수 있다.

江原道는 지난날 王朝의 변혁이나 歷史의 層折이 있을때 마다 重要한 背景이 되었으면서 그 歷史의 변죽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事實이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積極的 意識을 갖지 못하였던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江原道의 갈피 마다를 자세히 살펴보면 새로운 江原道象이 있음을 發見할 수 있다. 우리 歷史에서 栗谷만큼 改革을 主張했던 사람도 찾기 어렵고 開化 이전에 女子로서 男裝을 하고 名勝을 두루 돌고 漢文의 記行錄을 남긴 사람은 江原道의 金錦園 外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다. 高宗때 斷髮令이 내렸을때 '寧爲地下無頭鬼 不作人間無髮人'이라고 죽음으로 抗拒했던 春川儒生의 精神이 바로 毅菴의 義兵精神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李重煥이 擇里志에서 言及되어 있는 것이 江原道 사람의 全貌는 아니다.

江原學硏究는 江原道의 참 모습을 밝혀 來日의 江原道의 指標를 提示하여야 할 當爲가 있다. 그런데 그 範圍가 廣範하여 1+1=2라는 식의 等式의 成立이 어렵다 보니 道內 地域이나 硏究者, 硏究機關에 따른 作業의 重複이나 差異 등에서 오는 非經濟性을 想定할 수 있기에 이 作業效果의 極大化를 위하여는 이를 調節하는 機關의 設立이 要求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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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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