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역사문화 전통의 현대적 의미 김 영 기(강원일보 논설주간)

1. 강원도 역사문화의 10대 사건
강원도내에서 사람들은 언제부터 살았을까. 강원도내에서 처음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강원도내에서 처음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강원도의 임진강 상류, 남한강과 북한강의 상류, 그리고 동해안의 강과 바다가 맞닿는 여러 지역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최초, 누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발굴된 유적 속에서 대답한다. 국립박물관 선사시대 전시실이 그것을 증언한다. 이것이 강원도 역사문화 전통의 첫 번째 사건이다.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 강원도내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구석기시대 강원도내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과 같은 질문의 해답을 얻을 수 있으므로 강원도 역사 문화 첫 번째 사건에 포함시킬 수 있다. 강원도내에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강원도 역사문화의 뿌리가 일찍부터 내려져 있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강원도내에 살던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 어떻게 나라를 세웠을까. 어떻게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이룩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이 두 번째 강원도 역사문화의 사건을 증언한다. 강원도내에서 건국한 고대국가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춘천지방을 중심으로 한 맥국(貊國), 강릉지방을 중심으로 한 예국(濊國), 그리고 삼척지방을 중심으로 한 실직국(悉直國)이 강원도내에 실재했던 고대국가의 모습이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세 번째 사건은 강원도의 전지역이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삼국의 각축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백제가 처음에 진출했고, 고구려가 그 다음에 지배했고, 신라가 그 다음에 편입했다. 고구려가 우수주(牛首州·춘천지방), 하슬라주(何瑟羅州·강릉지방) 를, 신라가 실직주(悉直州·삼척지방), 하슬라주, 우수주를 행정구역으로 편성한 데서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네 번째 사건은 화랑도(花郞徒)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중 하나인 유오산수(遊娛山水)의 현장이 된 것이다. 신라의 강원지역 편입으로 화랑도의 통과의례 조건이었던 명승지 순례 대상지를 강원도로 삼았던 것이다. 명승지 순례의 전통은 신라시대 화랑도에서 고려시대 승려로, 조선왕조시대에는 선비로 이어졌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다섯 번째 사건은 후삼국(後三國) 통일의 현장이 된 것이다. 양길(梁吉)은 통일신라 말기에 북원(北原·원주)에서 봉기했고, 궁예가 여기에 합세한다. 궁예는 철원에 태봉국(泰封國)을 세웠으며, 춘천의 신숭겸(申崇謙), 박유(朴儒), 개성의 왕건(王建)이 합세한다. 신숭겸 등의 혁명으로 왕건이 왕위에 올라 고려(高麗)를 건국한다. 후삼국 최후 통일전선에는 강릉의 왕순식(王順式)의 부대가 참가,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킨다. 북원 삭주(朔州·춘천), 명주(溟州·강릉)의 탁월한 인물이 전면에 나서고 강원지역의 군사들이 합세해서 후삼국은 통일된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여섯 번째 사건은 글안유적(契丹遺賊), 몽골군(蒙古軍), 합단적(哈丹賊), 왜구(倭寇) 등 외적(外敵)의 침입에 대응 하는 항전(抗戰)의 현장이 된 것이다. 당시의 춘주성(春州城·춘천)의 군사와 주민은 몽골군에 항전하면서 물이 없어 소와 말의 피를 마셨고, 성이 함락되면서 모두가 죽음을 선택했던 향토 수호(守護)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일곱 번째 사건은 단군역사사상(檀君歷史思想)의 고장이 된 것이다. 항몽전쟁과 대몽외교, 그리고 고려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섰던 이승휴(李承休)는 두타산(頭陀山) 및 구동(龜洞)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어 단군역사사상을 내세웠다. 신라, 고구려, 백제, 예맥, 부여 그 모든 나라의 임금과 백성들은 단군할아버지의 자손으로 이 땅을 지켜왔다고 했다. 역사서사시 「제왕운기」 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보물 4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여덟 번째 사건은 고려 멸망을 지켜보고, 또 그 멸망을 수용하는 땅이 된 것이다. 고려의 건국이 실질적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그 멸망도 강원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은 처음에 원주시 손곡리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고성군 간성으로 유배되었다. 고성군 간성에서 다시 삼척시 궁촌리로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과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과 설악산을 왕래하면서 신라의 멸망을 지켜보았던 사건 또한 고려 멸망을 지켜보는 것과도 우연의 일치가 아닌 듯한 생각을 떠올린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아홉 번째 사건은 조선왕조의 건국이 강원도에서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李成桂)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는 전주에서 이주, 삼척시 활기리에서 살았으며, 목조(穆組) 이안사(李安社)는 그 무리를 이끌고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 갔다. 목조는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 등 부모의 묘를 세워 흥왕(興王)의 터로 삼았다. 이른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고장이 되게 했다. 고려가 이 땅에서 일어난 것과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열 번째 사건, 즉 마지막 사건은 일본의 침략에 항전하는 의병봉기(義兵蜂起)의 고장이 된 것이다. 춘천에서 5∼6천명 의 을미의병 봉기가 있었고, 8도 창의를 이끌었던 제천(堤川)의 의진(義陣)은 강원인 유인석(柳麟錫)이 지휘했다. 제1차 의병, 제2차 의병을 진두지휘하고 이끌었던 지도자는 강원도에 연고를 둔 인물이었다. 이는 고려시대에 글안유적, 몽골군, 합단적, 왜구를 물리칠 때의 향토수호, 조국수호 정신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사의 최초의 사건인 첫 번째 구석기시대부터 강원도에 사람이 살았던 사건에서부터 고대국가인 맥국, 예국, 실직국 등을 건국했던 두 번째 사건은 강원도 역사문화의 정체성(正體性)을 밝혀주는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삼국의 각축장, 네 번째 화랑도의 순례지는 이 땅은 소유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일찍부터 증언해주는 것이다. 다섯 번째 후삼국 통일의 현장, 여섯 번째 외침에 대한 항전의 현장, 일곱 번째 단군역사사상 재현의 현장은 통일시대의 역사의식을 바로 세우는 고장임을 제시해 준다. 여덟 번째 고려 멸망을 지켜보는 것과 조선왕조 건국을 준비한 것은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수용하는 땅의 기맥을 보여준다. 열 번째 구국항전의 의병봉기는 국난극복의 의지를 보여준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10대 사건은 강원도 역사문화의 정체성 모델을 선별하기 위해 임의로 정한 것이다. 강원도 역사문화의 정체성 모델은 수만 가지로 선별할 수 있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강원도 역사문화 10대 사건은 강원인이 한국역사 전면에 등장한 사건과 강원도 가 한국인에게 순례지로 선택된 사건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다.
2. 강원인의 한국역사 전면등장
조선왕조 태조 4년(1395), 을해(음력 6월 13일), 강릉도(江陵道)와 교주도(交州道)를 합하여 강원도(江原道)라 했다. 강원도 역사문화 전통은 이 때를 기점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사람이 처음 살았던 때로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때까지를 아우르고자 한다. 지금의 강원도 지역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강원인이라 하고, 그들이 한국역사 전면(前面)에 등장하여 통일 한국역사를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먼저 제시해 본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200여년 간은 평화의 시대였다. 태평성대가 끝나면서 정치의 문란, 탐관오리의 발호,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리겠다는 군웅(群雄)이 사방에서 할거했다. 북원경(北原京·원주)에서 일어난 양길(梁吉)은 주변의 30여개 성을 함락했다. 신라의 애꾸눈 왕자 궁예(弓裔)가 양길의 부하가 된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빌려 영월·삼척·울진·강릉·양양·간성·양구·인제·춘천·철원을 평정한다. 양길과의 대결에서 승리, 중부 지방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춘천에서 우거하던 신숭겸(申崇謙)과 춘천의 호족 박유(朴儒)가 궁예 막하로 들어간다. 개성의 왕건(王建)도 궁예 막하로 들어간다. 궁예는 후고구려·마진(摩震)·태봉국(泰封國)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면서 철원(鐵原) 풍천원(楓川原) 도읍시대를 연다. 태봉국은 당시 신라와 후백제와 함께 정립하면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태봉국은 강원도내에서 나라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강원도내 여러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농민군(農民軍)의 주축을 이루었다. 태봉국을 이끌던 지도자들도 대부분 강원도 지역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었다. 태봉국의 이같은 역사적 위상 때문에 강원왕국(江原王國)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궁예가 세운 태봉국, 강원왕국은 해양진출을 통해 서남해를 지배한다. 궁예는 왕건을 파견 전라남도의 해안지방을 정복하고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 후백제를 견제한다. 태봉국의 판도는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전라남도 해안지방, 충청도의 북쪽까지 넓어졌다. 태봉국은 당시 우리 나라 정치, 군사의 중심부를 이루게 되었다. 이때 태봉국의 중심인물과 군사의 기층을 강원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구축했었다.

궁예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신숭겸 등이 일어나 궁예를 쫓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옹립한다. 고려는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겼지 만 고려는 태봉국을 계승했다. 그러니까 좋은 말로 태봉국(강원왕국)의 변형이 고려이므로, 고려 또한 강원왕국을 옮겨놓은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견훤의 후백제 군사가 신라의 수도 경주를 약탈하고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는 연락을 받은 고려 왕건은 신숭겸을 앞세워 기병 5,000명으로 지금의 대구 팔공산지역에 이른다. 고려군과 후백제군의 격돌로 고려군이 패전한다. 살신성인, 신숭겸의 끝내기 전투로 왕건 은 겨우 목숨을 건진다. 고려가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강원도 연고 인물에 힘입고 있다.

태조 왕건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박유(朴儒)가 나아가서 뵈었다. 그는 경사( 史)에 밝았으므로 궁예가 동궁기실(東宮記室)로 올렸다. 궁예의 정사가 어지러움을 보고 출가하여 산속에 숨었다. 태조는 박유를 예( )로써 대우하고, 관대(冠帶)를 하사하고 기요 (機要)를 관장하도록 했다. 박유가 공을 세웠으므로 왕(王)씨 성을 사(賜)했다. 고려왕조의 정치 제도 학문기반을 다지는데 강원인의 역할이 컸다. 춘천에 와서 수진(守鎭)했던 견권(堅權)이 고려건국 2등공신이 되고 후백제와 최후 결전을 할 때 그는 대상(大相)에 올라 있었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고, 고려와 후백제가 일리천에서 마지막 결전을 할 때 명주대광 왕순식(王順式)은 긍준(兢俊), 왕염(王廉), 인일 (仁一) 등으로 마군(馬軍) 2만명을 거느렸다. 고려와 후백제의 마지막 결전에서 고려군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왕순식은 처음에 강릉에서 출전했다. 일리천에서의 고려군과 후백제군의 전투상황을 「고려사」열전 왕순식 조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왕건은 왕순식에게 짐이 꿈에 기이한 중이 갑병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튿날 경이 도왔으니 길조로다 라고 말했다. 그 때 왕순식은 신이 명주를 떠나 대현(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승사(僧祠)가 있었으므로 제사를 올려 승전하기를 기도했는데 주상(主上)의 꿈에 나타난 것은 이것일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에 왕순식이 고려군을 이끌고 후백제군과 싸울 때 왕건은 속인과 승려 두 신인(神人)이 병사를 이끌고 와서 도와주는 것을 꿈에 보았다고 했다. 대관령을 넘을 때 제사를 올렸다. 대관령 산신은 김유신장군으로, 성황신은 범일국사로 전해오고 있다. 후삼국 통일의 최후 결전장에서 고려군의 승리로 이끌었던 왕순식은 본명이 김순식(金順式)이었으며, 왕(王)씨 성을 왕건 태조가 내려서 왕순식이 되었던 것이다.

양길이 원주에서 봉기한 신라 진성여왕 5년(891)부터 고려 왕건 태조 19년(936)까지 후삼국통일의 발판을 만들었던 강원인은 양길· 궁예·신숭겸·왕유·왕순식 등이며, 강원도 전역에서 농민군으로 참여 그 주축을 이루었던 강원인들이 또한 후삼국통일의 밑바탕을 이루었다. 강원도, 강원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500여년 전 강원도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한국역사의 전면(前面)에 전면적(全面的) 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삼국통일을 실현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3. 한국인의 강원도 정체성 체험
신라 진흥왕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어 낭도를 모으고 화랑도(花郞徒)를 만들었다. 어진 보필(輔弼)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도에서 나오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실현시켰던 힘이 여기에서 솟아났다. 화랑도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세 가지 통과의례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화랑도들은 도덕과 의리를 서로 연마했다.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가 그것이다. 둘째 화랑도들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즐겼다. 상열이가락(相悅以歌樂)이 그것이다. 셋째 화랑도들은 산과 물에서 즐겨 멀리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유오산수 무원부지 (遊娛山水 無遠不至)가 그것이다. 도덕과 의리를 서로 연마하면 자연스럽게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충군(忠君) 애국(愛國) 효도(孝道) 우정(友情) 신의(信義)를 갖추게 된다.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기게 되면 자연스럽게 문학 예술 등의 소양을 갖추게 된다. 아름다운 산과 물에서 노닐고 즐기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연사랑 국토사랑 나라사랑의 체험을 갖게 된다. 화랑도의 오계(五戒)는 원광법사(圓光法師) 가 화랑인 귀산(貴山) 취항( 項) 등에게 가르친 것이지만 그 체득은 유오산천(遊娛山川)에서 이루어졌다. ①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事君以忠) ②효도로 부모를 섬기며(事親以孝) ③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交友以信) ④싸움에 나가 물러나지 않으며(臨戰無退) ⑤함부로 죽이지 말라(殺生有擇) 중에서 특히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 싸움에 나가 물러나지 않으며,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세 가지는 화랑도 들의 유오산천을 순례(巡禮)하면서 체득된 것이다. 국토의 명승지를 함께 순례 행진하면서 서로 도와 낙오자가 나오지 않게 함으로써 믿음이 생겼다. 강건한 신체에 강건한 정신을 담았다. 건전한 심신을 단련하면 전쟁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담력을 기르고 기(氣)를 높였다. 어떠한 도전에 대해서도 응전하는 힘을 함양했다. 화랑도들은 유오산천 중에 나무를 심고 기념하는 행사를 통해 자연을 육성했 으며, 사냥을 통해 짐승을 선별해서 잡는 살생유택의 생명존중사상을 체험했다. 그들은 순례지에 기념비를 세우고 돌에 맹세를 새겨 땅에 묻어 반드시 성공할 것을 다짐했다. 화랑도들의 순례지에서의 체험과 훈련이 삼국통일의 전선을 누비는 용감한 투사를 길러내는 바탕이 되었다.

화랑도들의 유오산수, 즉 순례지로 강원도 동해안 명승지가 첫손으로 꼽혔으며 그 다음이 경주 남산, 울산과 부산의 해안지역, 그리고 지리산지역이 선택되었다. 화랑도들의 강원도로 향한 유오산수(遊娛山水)의 행렬은 곧 강원도의 산수체험을 통해 신라인의 정체성 (正體性)을 획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화랑인 술랑(述郞)·남랑(南郞)·영랑(永郞)·안상(安詳) 등 4명이 동해안 명승지를 순례했다. 4명의 화랑이 3일 동안 놀았다해서 고성 해금강 삼일포(三日浦)라 부르게 되었다.

요원랑( 元郞)·예흔랑(譽昕郞)·계원(桂元)·숙종랑(叔宗郞)이 금란(金蘭)(지금의 홍천)을 유람할 때 임금께 치국(治國)의 포부를 알렸으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 등 노래 3수를 지어 왕께 아뢰었다. 왕은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화랑도들의 강원도 동해안 순례 기록들이 화랑도들의 강원도 정체성 체험을 통해서 신라인의 정체성 확립의 사례들이 증언된다. 화랑도의 초대 단장이었던 설원랑(薛原郞)의 기념비가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세워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또한 정체성 체험을 위한 순례의 길이 강원도 동해안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강원도 전역은 화랑도들의 순례지였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순례지였다. 의상대사(義湘大師) 원효대사(元曉大師) 자장율사(慈藏律師) 진표대사(眞表大師) 등 신라의 고승은 강원도 땅을 밟았다. 강원도 땅을 밟지 않은 승려는 큰 승려가 되지 못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로 접어들면 승려와 관료들이 순례의 물결을 이룬다. 지광국사(智光國師) 원공국사(圓空國師) 진공대사(眞空大師)는 법천사와 거둔사와 법흥사의 큰스님이었으며, 이자현(李資玄)은 춘천에 문수원(文殊院)을 중창하고 이승휴(李承休) 는 삼척에 간장사(看藏寺)를 세웠다. 강원도는 당대 지식층을 형성하는 승려들의 순례지였으며 역시 지식층을 형성하는 관료들의 순례지 였다. 강릉도(江陵道)의 존무사였던 안축(安軸)이 지은 경기체가(京畿 歌)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은 관료들의 순례행태를 보여준다.

조선왕조시대에는 선비와 관료들이 강원도 땅을 밟는 것을 선비되는 조건으로 삼기까지 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조선 중기의 정철(鄭澈) 이이(李珥) 이정구(李廷龜), 조선후기에 남장을 하고 동해안을 유람했던 여류시인 김금원 (金錦園)에 이르기까지 관동팔경 지역을 여행함으로써 선비정신의 정체성을 체득했던 것이다.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왕조시대에 화랑도와 승려와 관료와 선비들은 당대 지식층을 형성했고, 국토순례를 통해 지도력(指導力)을 배양했으며 한국적 지도이념의 정체성을 체득했다. 1970년대 이후 대중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대중 또한 국토순례를 통해 대중은 자기정체성을 체득하게 되었다. 화랑도들의 유오산천(遊娛山川)이 대중의 유오산천으로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국토순례의 대표적인 곳이 강원도였고, 현대의 관광지가 된 것이다. 지금의 강원도 관광명승지는 한국인의 정체성 체험의 현장이 되고 있다.
4. 강원도적인 가치와 세계적인 가치
강원인이 후삼국통일에 주류를 이루면서 한국역사의 전면에 전면적(全面的)으로 등장한 것과 강원도가 한국인이 정체성을 체득하는 현장으로 정해진 것 이 두 가지는 강원도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체이다.

강원도의 가치가 대접받고, 강원도의 이익이 존중되며, 강원도의 미래가 보장되는 강원도 세상을 추구하는 강원도정의 다섯 가지 논리에서도 강원도 역사문화 전통의 현대적 인식이 제시되고 있다. ①저개발의 낙후성이 「청정환경 1번지」로 ②냉전체제 붕괴와 「신동해권의 중심지」로 ③분단한국의 1번지에서 「통일한국의 1번지」로 ④산과 바다의 자연은 「한국관광의 1번지」로 ⑤무공해 청정환경은 「신산업의 요충지」로 부상하여 각광을 받게 된다.

이 다섯 가지 새로운 논리 중에서 「통일한국의 1번지」와 「관광한국의 1번지」는 강원인의 한국역사 전면 등장, 후삼국통일을 실현시킨 역사적 전통과 연계되어 있고, 한국인의 강원도 정체성 체험을 통해 강원도 관광명승지로 한국인이 몰려드는 전통과 연계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109년전부터 1,064년까지 45년간의 후삼국통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전면에 나서서 통일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은 강원인이었다. 후삼국시대 분단의 시련을 극복하고 통일의 평화를 찾게 했던 강원도 역사문화의 전통은 남북분단의 현실을 타개하고 남북통일 시대를 여는데 이바지하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분단의 현장이 되고 있는 강원도는 통일의 현장이 되어야 하며 분단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강원인이 바로 통일의 현장을 일구어내는 장본인이 될 수 있다. 분단 1번지에서 통일한국의 1번지로 강원인의 강원 도가 부상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424년 전부터 시작된 신라의 화랑도와 승려의 강원도 순례, 고려의 승려와 관료, 조선왕조의 선비와 관료의 강원도 순례는 한국인의 강원도 정체성 체험을 통한 한국인 정체성 체득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현대의 대중시대, 대중은 강원도의 관광명승지를 관광함으로써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 찾기를 시작했다. 강원도의 천혜의 자연은 한국관광의 1번지로서 역사문화 전통을 현대에도 살려내고 있다.

한국 역사문화의 전통 속에서 강원도 역사문화의 10대 사건, 그 중에서 강원인이 역사의 전면에 전면적으로 등장했던 힘과 강원도를 한국인의 정체성 체험 현장으로 삼았던 배경을 강원도 가치의 요체로 내세울 수 있다. 강원도적인 가치가 세계적인 가치로 전개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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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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