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학
- 문화의 세기, 21세기의 지역문화
- 강원도 역사문화 전통의 현대적 의미
- 문화환경의 변화에 따른 지역정체성의 문제와 전망
- 江原學의 어제와 오늘
- 江原 考古學의 회고와 전망
- 江原 地方史 硏究의 現在와 課題
- 강원도 민속학의 발전과정과 전망
- 조선조 중기 강원지방의 유학(儒學· 性理學)
- 강원지역연구의 동향과 특징
- 강원문화연구의 과제와 전망
- 강원학 연구의 의의와 정립방향
- 지역학 연구와 원주학
- 제주학 연구의 성과와 과제
江原 考古學의 회고와 전망 - 그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江陵大學校 白 弘 基
1. 머리말
1910年代에 처음 시작된 강원고고학 연구도 이제 80여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 동안 강원고고학이 어떤 방향으로 연구되어 왔는지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학사적 측면에서 강원고고학 연구 전반을 반성·평가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 강원고고학회는 오는 8월 26일 "강원 고고학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가질 예정이다.본고는 그러한 학술회의를 앞두고 강원고고학 연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대강 살펴보려는 것이다.
1910년대 關野貞, 鳥居龍藏, 澤俊一 등이 강원도 일대를 탐방하면서 유적과 유물을 조사한 것이 강원고고학 연구의 첫 출발이었다. 그 뒤 1960年代까지만 해도 강원도지방은 先史文化의 공백지대로 여겨지기도 했다. 有光敎一은《朝鮮櫛目文土器の 硏究》에서 " 경남의 新岩里에서 함남의 江上里까지의 동해안지방에는 즐문토기유적이 거의 없다."고 하였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펴낸《韓國支石墓硏究》 에서도 高城 이남의 東海岸에는 원래 支石墓가 잘 발견되지 않는 곳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1960年代까지의 강원도 지역의 선사문화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이 지역에 실제 유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조사 부진 때문이었다.
고고학의 궁극적 목적은 과거 인류의 역사를 밝히는 것이지만, 발굴이나 지표조사를 통한 물질적 자료의 양적 축적과 그 해석에 대한 深度있는 연구가 선행되지 못하면 고고학의 학문적 목표는 달성되지 못한다. 고고학이 곧 발굴이나 지표조사로 인식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고고학의 특성 때문이다. 이렇게 고고학의 기초를 이루는 발굴과 지표조사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인력이 없이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개개인이 임의로 조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표조사나 발굴을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조직체가 필요하고 그러한 조직체가 유기적으로 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전문기관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충분한 경비도 확보되어야 하고, 국가 사회적 제도상의 뒷받침이 따르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江原 考古學이 오랫동안 침체상태를 면치 못하였던 이유는 우선 고고학의 기초가 되는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기초조사를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하였던 것은 제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던 것이 그 중요한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年代 이후 현재까지 약 40여년 동안 점차 많은 고고학 자료들이 축적되어, 이제는 江原 先史文化의 독자적 문화권 설정이나 地域性을 모색해보려는 方向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본고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엄정한 硏究史的 考察을 해보려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年代順에 따라 江原 考古學의 전개과정을 대강 살펴보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2. 1945년 이전
1912年 關野貞, 谷井濟一씨 등이 江陵에 체제하면서 臨瀛館의 正門, 中門, 烏竹軒, 普賢寺, 郎圓大師碑 등을 조사하고 楓湖 東北方에 있는 下詩洞古墳群도 조사하였다. 이 때 수집된 新羅土器는 현재 東京大 大學院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자료는 최근 早乙女雅博이 소개하였다(早乙女雅博, 1998). 이어서 1915년에는 鳥居龍藏, 澤俊一 등이 강원지역을 탐방하면서 명주군 강동면 안인진리, 양양군 밀양리, 고성군 신암리, 거진리, 홍천군 발산리 등에서 유물을 수집하였는데(有光敎一, 1938) 이 때 春城郡 泉田里에 있는 支石墓, 積石塚 각 1基를 발굴하였다(金載元, 尹武炳, 1967). 이 泉田里 支石墓는 그 뒤 1931년 春川高等普通學校 日人 교사 永岡이 개인적으로 발굴하여 支石墓 1基에서는 半月形石刀, 石劍파편, 무문토기편을 수집하였고, 積石塚 1基에서는 石劍 1점, 石鏃 11점, 管玉 7점 등이 수집되었다고 한다(有光敎一, 1938). 1919년에는 原田淑人 등이 濊貊의 유적을 조사하면서 고성군 거진리 일대에서 유물도 수집하였다.이렇게 1910年代에 江原道 일대에서 수집된 유물들은 대부분 總督府 博物館에 수장되었고 1930年代에 澤俊一(1937), 有光敎一(1938) 등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1938년 有光敎一은 春川, 江陵 일원의 유적을 조사하면서 총독부 박물관의 수장품도 일괄 정리하여〈朝鮮江原道の 先史時代遺物〉 이라는 논문을 내놓았다. 이것은 일제하의 江原地方 先史時代 調査成果에 대한 종합적 고찰로 볼 수 있다(有光敎一, 1938). 有光은 이 논문의 서문에서 "漢江下流方面 즉, 경기도 관내에서는 풍부한 先史時代 遺蹟이 알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강원도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떠한 文化相을 나타낼 것인가. 南鮮과 北鮮에서 성행했던 石器時代文化는 嶺東地方에서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러한 점에 대한 흥미있는 고찰이 기대된다."라고 그의 연구목적을 밝혔다. 또한 결론에서는 "江原道의 유물을 통관할 때 다음의 두 가지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제하고 첫째, 江原道 先史文化는 일반적으로 南鮮的 색채가 농후하고, 北鮮이나 西鮮의 영향은 거의 인정되지 못하였다. 둘째, 石器時代로부터 金屬利器 사용의 시기에 이르는 文化相과 그 특징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유물이 풍부하다."라고 맺었다.
그 밖에 藤田亮策의 梅原末治 등의 저서와 논문,〈古文化綜鑑〉,〈朝鮮古蹟圖譜〉,〈朝鮮古蹟調査報告〉,〈古蹟資料〉,〈原田叔人 復命書〉,〈橫山資料〉등에도 강원도 지방에서 수집된 유물이 散見되지만 대부분 단편적인 자료에 불과하다.
3. 1945년∼1970년대
해방 후 1960년까지는 강원 고고학 뿐 아니라, 南北韓을 막론하고 考古學 硏究活動이 가장 침체된 시기였다. 美蘇軍政, 과도기의 혼란, 신생정국의 불안정, 국토 양분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모든 文化事業과 學術活動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한 중에도 北韓에서는 함북 웅기 松坪洞貝塚(1946년 발굴), 草島貝塚(1947년 발굴), 평남 온천군 궁산패총(1949년 발굴) 등이 발굴되었고, 南韓에서는 1945년에 국립박물관이 발족되었으나 뚜렷한 조사실적은 없었다.1945년 이후 1950년대 말까지 江原地方의 유적조사는 南韓쪽에서는 별로 없었으나, 北韓쪽에서는 여러 유적들이 조사되었다. 먼저 1953년 역사수업시간에 조선원시시대에 대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원산제3중학교 학생들이 중평리 일대에서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1958년까지 100여점을 수집하였다고 하며 이 자료들이 소개되었다(리장섭, 1958). 1958년 안변군 용성리 고분(백기하, 1958), 1958년 룡천군 구읍리 고분군(량익용, 1962)이 원산 역사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그 결과 古新羅末期의 石室墳이 확인되었다.
1960年代에 들어와서는 南北韓을 막론하고 江原地方에서도 적지 않은 유적들이 조사되기 시작하였다.
南韓에서는 1961년 고성군 巨津里의 支石墓群(최숙경, 1961), 1962년 草島里의 無文土器散布址 등이 조사되었다(최숙경, 1962). 이 조사는 해방 후 강원지방의 선사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로는 최초로 실시된 것이다. 春川 校洞 穴居遺蹟(김원용, 1963), 江陵市 浦南洞 住居址(이난영, 1964)는 발굴된 것은 아니나 발견 즉시 현장이 조사되고 일괄유물도 함께 수습되어 오늘날까지도 고고학의 중요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春川 校洞 遺蹟(金元龍, 1963, 1968)은 발견 당시에는 신석기시대 후기로 추정되었으나 양양군 오산리유적의 발견으로 신석기시대 전기의 오산리 유형으로 판명되었다.
1966년과 1967년에는 春城郡 泉田里 支石墓 3基와 積石塚 3基가 발굴조사되었다. 이 조사에 의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泉田里 支石墓와 積石塚의 형태와 구조가 어느정도 파악되었으나 이미 유구가 전반적으로 훼손·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에 原狀이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못하였다(金載元·尹武炳, 1967).
그 밖에 명주군 영진리, 가둔지 신석기 유적(임효재, 1966), 양양군 정암리 출토 細形銅劍, 粗紋鏡(김원용, 1967) 등이 조사보고 되었고, 江陵·春川 일대의 支石墓(조동걸, 1968), 1969년에 발견된 江陵 草堂洞 新羅古墳, 무문토기, 타날문토기(백홍기, 1975, 1977, 1984) 등이 소개되었다.
한편 1960년대 江原道 北部地域에 대한 북한 고고학계의 조사보고로서 참고할만한 것으로는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원산 역사박물관에서 수집된 자료를 정리하여 소개한 것이 있다(량익용, 1961). 그 밖에 고성군 봉화리의 신라 수혈석곽분(백련행, 1967), 문천군 남창리 토광묘(원산 역사박물관, 1983), 문청군 교성리 토성지(안병준, 1967) 등의 조사보고서가 나왔다.
1960년대에 이어서 1970년대에도 대략 같은 수준의 유적조사가 계속되엇다.
1970년에 명주군 강동면 하시동에서 竪穴式 石槨墳 100餘基가 발견되었는데, 이 때 237基의 도굴갱이 발견되어 대규모의 新羅古墳群 지대임이 확인되었다. 그 중 西一호분, 二호분의 구조와 출토유물이 소개되었다(金正基·李鍾哲, 1971). 이 下詩洞古墳에서는 1912년 關野貞 등에 의하여 新羅土器들이 채집되어 현재 東京大 大學院에 수장되어 있으며, 최근에 소개되었다(早乙女雅博, 1998). 1969년 江陵 草堂洞에서는 江陵敎育大學 건물신축공사 중 新羅 竪穴石槨墳 3基(2∼4호)가 파괴되면서 新羅土器類와 馬具類가 출토된 바 있는데, 여기서 나온 자료가 소개되었고(백홍기, 1975), 같은 해 草堂洞 公會堂건물 신축공사 중에도 신라고분 1基가 파괴되어 수습보고 되었다(김병모, 1971).
1973년 原城郡 法泉里에서 石槨墓 2基가 발견되었는데(김원용, 1973) 여기서 출토된 土器와 靑磁形器는 백제계로 알려졌다. 한편 1978년에는 삼척읍 城北里 葛夜山에서 積石古墳이 발견되어 조사보고되었다(최순우, 1978). 여기에서는 太環式 귀걸이 한 쌍, 琉璃玉 24점, 硬玉製 曲玉 1점, 馬具類, 工具類, 新羅土器 등이 출토되엇으며 그 연대는 5∼6세기로 추정되었다.
1971년 팔당댐·소양댐 수몰지구에 대한 조사의 일환으로 春城郡 地山面 內坪里에서 新石器時代 住居址가 발굴조사되었다 (한병삼 외, 1974). 內坪遺蹟에서 출토된 櫛文土器는 西部地方 新石器時代 後期遺蹟인 金灘里 Ⅰ·Ⅱ 土器와 유사한 것으로서 西韓 新石器後期文化가 한강을 따라 北上한 전파경로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 밖에 襄陽郡 甘谷里 無文土器 遺蹟(崔夢龍, 1972), 江陵 草堂洞 無文土器 遺蹟(백홍기, 1977), 春川 溫衣洞 無文土器 遺蹟(임세권, 1977) 등이 소개되었으며, 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된 橫城 講林里 출토 細形銅劍, 銅鏡 등 일괄유물(이강승, 1977), 인제군 북면 월학리 출토 磨製石鏃 14점, 石劍 1점(한영희, 1977), 原城郡 文幕面 宮村里 마제석촉 6점, 반월형석도 1점 등 일괄유물(한영희, 1977) 등이 자료로서 소개되었다.
1970年代 江原 考古學에서 特記할만한 사실은 1977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사실이다(백홍기, 1978). 손양면의 해변가에 있는 雙湖 북변의 낮은 砂丘에서 농업용수로 공사를 위해서 東西長軸의 砂丘를 南北으로 절단하면서 유구가 파괴되고 토기편이 일대에 散在되었다. 발견 당시 지표에서는 土器片 400여점, 어망추 10여점이 수집되었는데 東北系의 平底土器와 中西部系의 尖底櫛文土器가 混在되어 있었다. 兩系 土器의 先後關係와 年代 등은 1980年代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6차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하여 밝혀졌다(임효재·권학수, 1984, 김원용·임효재, 1985). 한편 오산리에서 서북쪽으로 300m 떨어진 손양면 松田里에서도 즐문토기편의 산포지가 발견되었다(백홍기, 1980).
1945년 이후 1970년대까지 江原 考古學 調査는 우연히 발견된 유적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원고고학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과 그 중요성은 충분히 부각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70년대에 강원대, 강릉대, 춘천교대 등 도내 대학들이 본격적인 지표조사에 들어가서 중요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점이 주목되며, 이것은 1980년대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 단계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보아도 좋을 듯 하다.
4. 1980년대∼1990년대
1980년대 강원도 선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의 새로운 章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中島遺蹟 發掘調査와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양양군 鰲山里遺蹟 發掘調査였다.이와 함께 강원대학교, 강릉대학교, 한림대학교 등 현지대학 박물관들도 본격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나섬으로써 강원고고학 발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① 中島遺蹟 調査
1977년부터 中島 新梅里 일대의 지표조사를 해 온 국립중앙박물관은 1980∼1984년까지 5회에 걸쳐 발굴을 실시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1980, 1981, 1982, 1983, 1984) 그 결과, 中島에서는 竪穴住居址 2基(중도 1호, 2호)와 支石墓 2基(중도 Ⅰ·Ⅱ호)를 확인하였고, 新梅里에서는 竪穴住居址 2基(신매리 1호, 2호)와 支石墓 3基(심매리 1호, 2호, 3호)를 확인하였다. 中島 住居址 1호, 2호는 "中島型 住居址"로 지칭되었고 대표적 토기는 "外反口緣壺"이다. 鐵器는 刀子, 鎌, 鏃 등이 출토되었다. 住居址의 年代는 1∼2세기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中島 鐵器時代文化에 대해서 조사자는 "기존의 東北系 無文土器 文化를 바탕으로 西北地方에서 새로 파급된 鐵器文化 의 수용과정에서 北漢江 유역에 형성된 地域性이 强한 文化로 규정하였다(이건무 외, 1980).
1983년에 발굴된 中島 1호 支石墓는 蓋石 밑에 積石이 부가된 小形 石棺이 조성된 것인데 구덩이 안에서 直接火葬된 모습이 확인되었다. 2호 支石墓는 蓋石과 그 밑의 積石만 확인되었다. 그 연대는 B.C 2∼3세기로 추정되었으며, 조사자는 中島 支石墓의 末期的 性格과 함께 積石塚으로의 전개를 역력히 시사해주는 것으로 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81년 新梅里에서 住居址 2기와 1984년에 支石墓 3基를 확인하였는데, 住居址에서는 孔列土器, 口脣刻目文土器, 赤色磨硏土器, 變形角形土器가 出土되었고, 支石墓에서도 이와 유사한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그 연대는 B.C 4세기 경으로 추정되었다.
조사자는 "中島와 新梅里 일원에서는 여러 형식의 支石墓와 住居址가 혼재하고 있어서 이러한 樣相이 時期的 差異인지 또는 文化的 背景의 差異에서 오는 것인지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맺었다(지건길·이영훈, 1984)
한편 1981년 江原大學校 博物館은 中島 東南쪽에 위치한 積石塚 1基를 발굴하여 그 築造課程과 墓室 내부 구조를 밝혔으며 無文土器, 打捺文土器, 청동제 귀걸이 1점, 철도자, 철촉, 철정 등이 出土되어 그 연대는 A.D 1∼2세기로 比定되어 中島 1, 2호 住居址와 同時期로 推定되었다(박한설·최복규, 1982).
1981년의 中島調査에서 翰林大學校博物館은 支石墓 2基(1호, 2호)를 발굴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최초로 "積石支石墓"라는 特異한 構造의 支石墓를 설정하였으며, 그러한 積石支石墓가 中島에서 마련된 背景은 中島의 特殊地形 즉 砂質堆積土의 制約때문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 年代는 B.C 4∼1세기로 추정되었으며, 中島 철기시대 주거지보다 先行하는 것으로 보았다(노혁진·최은주, 1982).
1983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은 中島의 중심부에서 支石墓 1基를 발굴하였는데, 1981년 한림대 발굴팀이 발굴한 2基(1호, 2호)와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발굴된 2基(Ⅰ호, Ⅱ호)와 유사한 "積石支石墓"로 확인되었으며, 그 연대도 B.C 3∼2세기로 추정되었다 (최복규, 1984).
1984년 翰林大學校 博物館은 新梅里 유적에서 支石墓 5基와 철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문화층이 겹쳐진 累層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에 의하여 新梅里 支石墓는 < 蓋石+積石> 형식과 < 蓋石+石棺+積石> 형식으로 分類되었으며, 後者는 "積石支石墓"라는 독자적 형식설정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으나, 積石塚과의 관계문제는 불확실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최영희·노혁진, 1986).
② 양양군 鰲山里遺蹟 調査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1981∼1987년도까지 6차에 걸쳐 오산리 유적을 발굴하여 住居址 12基와 積石遺構 4基, 小割石遺構 2基를 확인하였다 (임효재·권학수, 1984, 김원용·임효재, 1985, 임효재·이준정, 1988). 이들 유구가 발견된 오산리 제 1문화층은 국내 最古의 文化層으로 主張되었으며, 土器의 형태와 문양, 백두산 원산지 흑요석 등은 東北韓 地方과 관련되나 土器의 細部的 文樣이나 磨製石器 등에서는 獨自的 地域性을 보여주고 있다. 제 3문화층의 첨저빗살무늬토기는 전형적인 西海岸式 櫛文土器와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오산리 下層類型의 신석기문화는 春川 校洞에서도 확인되었고(김원용, 1962), 최근 고성군 文岩里에서도 새로 확인되었다(윤근일, 1999).
③ 양구군 上舞龍里 遺蹟 調査
1980년대에 들어와서 횡성군 현천리(1982), 홍천군 하화계리(1984), 명주군 심곡리(1984), 양양군 도화리(1984) 등 구석기 유적들이 발견 되기 시작하였고, 1987년에는 양구군 상무룡리에서 강원도 지역에서는 최초로 강원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조사되었다. 이 유적의 발굴로 인하여 북한강 상류의 내륙 깊숙한 산악지대에서도 대규모의 유적 발견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흑요석 석기, 석영 석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특히 石器 未製品과 파편의 비율이 높고 모루돌이 발견되어 석기제작행위가 직접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상무룡리 유적은 중기 구석기시대와 후기 구석기시대의 문화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관련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되어 있다(최복규, 1989).
④ 其他 遺蹟 調査
1980년대에 이상과 같은 중요 유적조사가 진행되는 한편, 그 밖의 강원지역에서도 여러 유적들이 발굴조사되었다. 1983년에 양양군 가평리에서 長方形 住居址 2基(백홍기, 1984)와 횡성군 둔내에서 住居址 3基(원영환·최복규, 1984)가 발굴되었다. 두 지역의 주거지는 모두 철기시대 주거지로서 春川 中島 주거지와 함께 강원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의 특징과 그 전개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987년 양구군 공대리에서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지석묘 3基를 발굴조사하여 탁자식 2기(8호, 10호), 개석식 1기(6호)가 확인되었으며, 경희대학교 박물관에서도 양구군 고대리에서 支石墓 2基를 조사하여 토광적석 위에 세운 卓子型 支石墓임이 확인되었다(강원대학교 박물관, 1989).
1980年代 歷史考古學의 조사로는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 소재 山寺址(백홍기, 1984), 양양군 강현면 陳田寺址(정영호, 1989), 인제군 북면 한계리 寒溪寺址(최복규, 1985) 등이 발굴되어 강원지역의 불교사 연구에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2) 1990년대 遺蹟調査의 進展
1980년대의 강원고고학 조사는 한 두 예외적 구재발굴조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학술적 목표로 발굴조사된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의 40여건에 달하는 발굴조사는 대부분이 각종 산업개발과 관련된 구재발굴조사였다는 점에서 뚜렷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① 철기시대 集團聚落址 調査의 進展
1989년 강릉대, 강원대, 관동대 3개 대학 박물관은 명주군 안인리에서 시굴조사에 착수하여 1991년까지 1년 3개월간에 걸쳐 합동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安仁里 Ⅰ期로 편년된 呂字型 住居址 15基, Ⅱ期로 편년된 凸字形 住居址 20基 등 37基의 철기시대 집단 취락지가 발견되어 당시 국내에서는 최초로 대규모의 집단취락지가 확인되었다(백홍기, 1991). 呂字型 住居址는 안인리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나 그 뒤 영동지방에서는 명주군 연곡면 冬德里(강릉대학교 박물관, 1997),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에서 발굴조사되었고, 영서지방의 횡성군 둔내(강릉대박물관, 1997)에서도 발굴조사되어 철기시대의 강원지역의 특징적 지역 형식으로 설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밖에 최근 강릉 柄山洞에서 35基(강릉대학교 박물관, 1998), 주문진 橋項里에서 35基(강릉대학교 박물관, 1998), 동해시 松亭洞에서 45基(강릉대학교 박물관, 1999)에 달하는 대규모의 철기시대 集團聚落址 유적이 발굴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발굴조사의 진전으로 地域編年 設定도 시도될 수 있게 되었으며, 개별 유구·유물에 대한 형식학적 연구나 복원적 해석 뿐 아니라, 生業이나 社會集團의 樣相도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강원지역에서 조사되고 있는 철기시대 주거지의 연대는 대략 B.C 1세기∼A.D 3세기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시기는 바로 濊國과 貊國時代에 해당되기 때문에 앞으로 여기에 대한 歷史的 事實을 뒷받침할 수 있는 考古學 資料가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② 靑銅器時代 聚落址 調査의 進展
1990년 강릉시 연곡면 방내리에서 강릉대학교 박물관은 청동기시대 前期의 주거지 12基를 확인하였다. 이것은 강원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굴조사된 청동기시대 前期의 聚落址 遺蹟이다. 방내리 주거지에서 출토된 孔列二重口緣土器는 西北系 角形土器와 東北系 孔列土器가 혼합된 복합형식의 토기로 알려진 것으로서 江原地方의 東海岸 地域에서는 처음 출토되어 兩系文化가 복합된 地域은 漢江地域으로 認識된 종래의 通說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강릉대학교 박물관, 1996).
1992년 속초시 朝陽洞에서 청동기시대 前期의 住居址 7基와 支石墓 2基가 발굴조사되었다(강릉대학교 박물관, 1992). 朝陽洞 출토 土器의 特徵은 口緣部에 短斜線文과 口脣刻目文이 장식된 孔列二重口緣土器가 主流를 이루고 있는 점인데, 이것은 西北系의 角形土器와 東北系의 孔列土器가 복합된 樣相을 가장 明白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朝陽洞 住居址의 放射性炭素測定年代는 2830±60B.P(교정연대 1130∼840 B.C)이다. 한편 朝陽洞 1호 支石墓는 전형적인 石槨形의 蓋石式 支石墓로 확인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扇形銅斧는 南韓에서는 唯一한 實物이다.
1992년 양양군 양양읍 포월리에서 청동기시대 前期의 住居址 13基와 支石墓의 下部構造 3基가 확인되었다(강릉대학교 박물관, 1992). 포월리 주거지에서는 坊內里, 朝陽洞에서 출토된 孔列二重口緣土器는 없고, 홑口緣의 孔列土器와 無文土器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時差 때문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1997년에는 강릉시 교동에서 청동기시대 前期의 住居址 5基가 확인되었다(강릉대학교 박물관, 1997). 교동 住居址에서는 東北系의 孔列土器와 西北系의 二重口緣土器와 함께 組合되어 있었으나 兩系 土器의 복합형식인 朝陽洞式 孔列二重口緣土器는 나타나지 않았다. 교동 土器는 形式學的 側面에서 兩系 土器의 共存段階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兩系 土器文化의 共存段階인 강릉 교동유적과 兩系 土器文化의 복합단계인 속초 조양동, 강릉 방내리 유적의 先後關係는 방사성탄소측정연대에 의하여 " 교동 - 조양동 - 방내리 - 포월리 "순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1990年代 江原嶺東地域에서는 청동기시대 前期의 聚落遺蹟들의 발굴조사가 진전되어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前期文化의 내용과 그 형성과정이 선명하게 究明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 청동기시대 前期의 "孔列二重口緣土器文化"는 함경남도 토성리, 금야리, 중리 유적과 그 중간지역인 영흥유적에서도 調査 例가 보고되고 있어서(백홍기, 2000) 南韓地方 全域에서 나타나고 있는 청동기시대 前期의 孔列土器文化는 中部 東海岸地域에서 형성되어 점차 漢江 이남으로 확산되었음이 좀 더 확실하게 입증될 것으로 전망된다.
1992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은 1987년의 조사에 뒤이어 양구군 양구읍 공수리, 고대리 일대에서 支石墓群 13基를 발굴조사하였다(강원대 학교 박물관, 1992). 조사 결과 卓子式 支石墓 5基, 蓋石式 支石墓 7基가 확인되었으며, 3개소의 채석장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95년 한림대학교 박물관은 춘천시 칠전동에서 초기철기시대의 粘土帶土器가 출토되는 취락지를 발굴조사하였다. 그 연대는 B.C 4세기 중엽∼B.C 2세기로 추정되었으며, 北漢江 流域의 粘土帶土器文化의 형성과정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강원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굴조사 되었다.
1998년 영월군 하동면 외룡 1리에서 한림대학교 박물관은 支石墓 4基(1∼4호)와 住居址 3基(1∼3호)를 발굴조사하였는데 支石墓는 모두 卓子型으로 확인되었고, 住居址는 철기시대나 그 이후로 추정되었다.
1989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에서 단국대 박물관은 基盤型 支石墓 4基를 발굴조사하였다.
③ 新石器時代 聚落址 調査의 進展
1995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은 양양군 현남면 지경리에서 신석기시대 住居址 10基와 철기시대 凸字型 住居址 7基를 발굴조사하였다. 그 중 4호 住居址에서는 完形 土器 13점이 출토되었는데 中西部地域의 櫛文系土器로 확인되었으며, 그 연대는 4590±70B.P(보정연대 3350B.P)이다. 그리고 6호, 7호는 上下로 겹놓여 있었는데 위의 6호는 東南部地方 수가리토기와 유사하고, 7호는 4호와 일치되었다. 7호의 연대는 4600±80B.P(보정연대 B.C 3355)이고, 6호는 4420±60B.P(보정연대 B.C 3035)로 나왔다. 이러한 탄소측량연대의 차이와 兩系 土器文樣의 差異를 근거로 地境里 Ⅰ期와 Ⅱ期로 구분하였다(강릉대학교 박물관, 1995).
1994∼1996년에 文化財硏究所는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에서 연차 발굴을 실시하여 新石器時代 住居址 2基와 野外爐址 3基를 확인하였다. 柯坪里 住居址의 연대는 4570±60B.P(보정연대 B.C 3000년경)이다(문화재연구소, 1999).
1990년대 강원지방 신석기시대 유적조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고성군 죽왕면 文岩里遺蹟 調査이다. 1998년 文化財硏究所는 文岩里에서 住居址 3基와 野外爐址 5基를 확인하였다. 文岩里에서는 東北系의 平底土器가 主流를 이루는데 양양 오산리와 춘천 교동과 同類型의 압날문, 음각문이 시문된 토기와 三角集線의 隆起線文이 공반출토되었다(윤근일, 1999).
이상과 같이 1990년대에 地境里, 柯坪里, 文岩里 遺蹟의 발굴조사가 진전됨에 따라 江原地域의 新石器時代 前期(오산리, 춘천 교동, 文岩里), 中期(地境里Ⅰ·Ⅱ, 柯坪里), 後期(內坪洞)로 이어지는 편년설정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④ 舊石器時代의 遺蹟調査의 進展
1990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은 홍천군북방면하화계리에서 중석기시대 문화유적을 발굴조사하였다(최복규, 1992). 하화계리 유적은 細石器가 주종을 이루는 전형적인 중석기시대 유적으로서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細石器의 제작에 사용된 石材로는 흑요석, 수정, 판암, 석영 등 細石器 제작에 유용한 石材들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1995년에 발굴된 하화계리 유적의 연대는 13,000∼10,000B.P로 추정되었다.
1994년에 강원대학교 박물관은 동해시 발한동에서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구석기시대 유적을 발굴조사하였다(강원대학교박물관, 1996).
1998년부터 현재까지 강원대학교 박물관은 철원군 장흥리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조사를 계속중이며, 찍개, 밀개 몸돌, 격지 등의 석영제 석기, 흑요석 및 수정제 석기 등이 발굴되었고, 퇴적층의 최상부에서는 3cm 미만의 소형 긁개, 밀개 뿐 아니라 좀돌날이 포함된 세석기 문화층이 검출되었고, 그 아래층에서는 석영석기 중심의 후기 구석기 문화층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1999년 강원대 박물관은 동해시 구미동 구석기 유적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구석기 2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중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되었다.
⑤ 三國時代 古墳調査의 進展
1990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은 정선군 정선읍 신월리에서 新羅竪穴式石槨墳 2基를 발굴조사하였다. 그 중 11호분에서는 소뼈가 발견되 었다(강원대학교 박물관, 1991).
1993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은 강릉 초당동에서 石槨墓 24基, 石槨合口式甕棺墓 3基, 合口式甕棺墓 4基를 발굴조사하였다(강릉대학교 박물관, 1993). 그 중 B-16호 墓에서는 出字形 金銅冠, 十字葉形飾金製環頭大刀, 太環式 귀걸이, 유리구슬이 출토되었으며, B-16호와 나란히 발견된 B-15호 墓에서는 태환식 귀걸이 1쌍과 많은 양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1993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은 연곡면 영진리에서 土壙木槨墳 23基, 石槨墓 7基, 甕棺墓 2基, 방내리에서 橫穴式石槨墓 1基, 石槨墓 5基, 원포리에서 石槨墓 7基, 石棺墓 1基 등의 新羅古墳群을 발굴조사하였다(강릉대학교 박물관, 1993).
1993년 한림대학교 박물관은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서 石室墳 2基를 발굴하여 말각조정식 단실분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2호에 시설된 방형석축기단이 주목되었다(한림대학교 박물관, 1995).
그 밖에 新梅里 古墳(조유전, 1987), 춘천시 東面 萬泉里 古墳(한림대학교 박물관, 1995)에서도 고구려系 石室墳이 발굴조사되었다. 또한 原州郡 法泉里에서는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서 百濟系 古墳이 발굴조사 중이다.
이러한 三國時代 古墳에 대한 調査의 진전에 의해서 강원도 내에는 三國時代 古墳群도 적지 않게 분포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이러한 三國時代 古墳硏究는 考古學的 硏究뿐만 아니라 그 文化的·歷史的 背景의 照明과 함께 江原 考古學이 밝혀내야 할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5. 맺음말
이상 1910년대 이래 이루어진 江原考古學硏究에서 주로 地表調査와 發掘調査만을 대상으로 그 흐름을 대강 살펴 보았다. 의외로 조사된 유적의 수가 많아서 제한된 시간과 지면관계로 전체 내용에 대한 깊이 있는 검토를 하지 못하고 조사의 진전 상황만을 피상 적으로 살펴본데 불과 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사되고 있는 江原考古學의 資料를 통해서 볼 때 江原地域의 先史文化는 신석기시 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국시대를 막론하고 地域的 特性이 明白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고, 아직도 충분한 것은 아니나 地域編年도 設定해 볼 수 있는 資料가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이러한 江原考古學調査硏究의 진전으로 이제 함경남도 南部地域을 포함한 江原地域 일원은 한반도 "中東部先史文化圈"으로 設定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본고에서 편의상 구분해 본 ① 1945년 이전, ② 1945년 이후∼1970년대, ③ 1980년대∼1990년대는 그 時期 나름의 연구경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즉 ①의 시기는 江原考古學이 시작된 단계, ②의 시기는 본격적인 조사연구를 위한 準備단계, ③의 시기는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江原考古學 硏究史의 分期를 ① 萌芽期(1945년 이전), ② 準備期(1945년 이후∼1970年代), ③ 發展期(1980年代 ∼ 1990年代)로 잠정 설정해보고, 앞으로 다방면에 걸친 심도있는 學史的 檢討를 거치면서 江原考古學 硏究史의 分期를 수정·보완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江原考古學硏究는 地表調査와 發掘調査외에 총람적 종합적 연구도 있고, 개별적인 훌륭한 硏究論文들이 多數 나와 있으나 본고에서는 이를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여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예 대해서는 江原考古學會에서 계획되어 있는 학술회의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될 것으로 期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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